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 (문단 편집) ==== 대 [[프랑크 왕국]] 전쟁 (554년) ==== 553년,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동고트 왕국]]의 테이아는 비티게스의 선례를 따라 프랑크 왕국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당시 아우스트리아[* 프랑크 족의 분할 상속의 결과물로, 랭스 왕국이라고도 불린다. 이후 동프랑크 왕국의 영토와 얼추 비슷하다.]의 군주였던 [[테우데발트]]는 정규군 파병을 반대[* 그의 왕비는 [[랑고바르드족]] 왕녀였는데, 랑고바르드 군대의 상당수가 동로마 용병으로 참전한 상태라서 이탈리아 땅에 군침이 돌았지만 프랑크 정규군을 파병할 수 없었던 것이다.]하였다. 하지만 선왕 테우데베르 1세가 중용하였던 알레마니 부족[* 같은 게르만계로서 프랑크에 부용(附庸) 부족으로 소속되어 있었다. 유목 내지는 반농반목집단으로서 문화 및 혈통적으로 비슷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고구려 밑의 숙신 - 말갈, 원 밑의 거란, 후금 - 청 밑의 몽골, 오스만 밑의 크림 타타르 같은 경우이다.]의 족장인 레우타리스(Leutharis)와 부틸리누스(Butilinus) 형제가 출정을 강력히 주장하자 테우데발트는 결국 지원을 허가하였다. 그동안 몬스 락타리우스 전투에서 테이아가 전사, 그들이 돕고자 하였던 동고트 왕국은 멸망하였지만 파병은 예정대로 이루어졌다. 여세를 몰아 프랑크로 쳐들어 올 수 있으니 그러기 전에 이탈리아에서 일종의 [[예방전쟁]]을 벌일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리구리아]] 지방은 프랑크 왕국의 영토이자 알레만 족이 관리하였는데, 프랑크측은 이탈리아가 단일 세력 하에 통합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리고 티키움(파도바), 베로나, 브레시아 등 북 이탈리아의 포 강 중류 일대는 아직 동고트 잔당이 장악하고 있었기에 그들을 도와 나르세스의 동로마 군의 독주를 저지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나르세스는 캄파니아 일대의 고트족 거점들을 정리해 나가던 중이었다. 역사가 아가티우스에 의하면 알레마니 족이 주축이 된 7만 5천 명의 게르만 대군이 553년 초엽에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은 나르세스는 몬스 락타리우스 전투의 피로가 가실 틈도 없이 새로운 방어 체계를 구축해야 하였다. 그는 시칠리아에 주둔해 있던 아르타바네스의 군대를 소환하여 아펜니노 산맥의 고갯길에 주둔시켰다. 한편, 침공군은 북이탈리아의 동로마 거점이었던 파르마[* 나르세스는 북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파르마를 동고트 잔당 일소를 위한 전진 기지로 삼았으나 프랑크 왕국의 침입으로 계획을 연기하여야 했다.]를 함락하였다. 그곳의 로마군은 헤룰리 용병이 대다수였는데, 지휘관 풀카리스는 패배 이후 파벤티아(파엔차)로 후퇴하였다. 그리고 겁을 먹은 아르타바네스도 역시 파벤티아로 철수하였다. 이후 나르세스의 독촉을 받아 다시 파르마로 북상하였고, 피사우룸에서 훈족 용병대와 게르만 부대의 퇴로 차단을 맡았다. 7만 대군의 기세를 회전으로 막기 불가능 하다는 것을 느낀 나르세스는 이탈리아 중남부 일대의 도시들에 수비대를 분산 배치하였고, 자신은 나머지 군대를 모아 이듬해 봄까지 로마시에 주둔하였다. 554년 초엽, 게르만 대군은 이탈리아 중부 일대를 약탈하였고 삼니움(중남부 베네벤토 일대)까지 남하하였다. 레우타리스와 부틸리누스는 병력을 둘로 나누어 양갈래로 나뉜 이탈리아 남부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레우타리스는 아풀리아, 부틸리누스는 칼라브리아와 캄파니아로 진격하기로 하였는데,[* 누가 봐도 후자에게 유리한 결정이었다.(브린디시, 바리, 타란토, 오트란토 vs 나폴리, 카푸아, 쿠마이, 살레르노, 아말피, 크로토네, 메시나)] 레우타리스는 약탈할 것이 적었는지 먼저 갈리아로 돌아갔다. 나르세스는 그들을 고이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고, 아르타바내스의 군대를 피사룸[* 현 페사로, 리미니 근처에 위치] 인근에 매복시켰다. 동로마 군대와 훈족 용병은 파눔 전투에서 알레마니 군의 선발대를 전멸시키는 쾌거를 올렸고, 그 틈을 타서 많은 로마인 포로들이 자유를 얻었다. 알레마니족은 대부분의 약탈물을 버린 채로 맨몸으로 도주하였다. 다만 아르타바네스는 2만이 넘는 알레만 본대와 직접 정면 대결을 하진 않고 나르세스의 본대에 합류하였다. 이후 레우타리스의 패잔병들은 알프스 산맥을 넘는 여정에서 전염병의 습격을 받았고 레우타리스 본인을 포함한 많은 희생자를 낸 채로 돌아가야 했다. 한편, 부틸리누스의 군대는 고트족들과 합세하여 칼라브리아 일대를 약탈하였는데, 전염병에 걸려 3만의 군대가 2만명으로 축소되어버렸다. 그러자 부틸리누스는 554년 늦여름 경에 캄파니아로 회군, 마차를 둥글게 모아 숙영지를 세웠고 볼투르누스 강의 다리를 지키기 위해 큰 탑까지 지었다. 그해 9월에 척후병을 통해 게르만 진지의 위치를 파악한 나르세스는 1만 8천의 동로마 군대를 이끌고 로마시에서 남하, 캄파니아로 향하였다. 이후 나르세스는 '아르메니아인' 카라난제스 휘하의 기병대를 파견하여, 그들의 보급선을 교란시키게 하였다. 특공대는 운전병과 보초병들을 제거하고 몇개의 마차를 사로잡았은 것에 그치지 않고 그중 하나에 불을 붙여 근처의 탑에 돌진시켰다. 탑이 무너지고 다리가 무방비로 노출되자, 위기감을 느낀 게르만 군대는 다리를 건너 동로마 군대를 향해 나아가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이때, 동로마 진영에 악재가 발생하였다. 헤룰리 용병[* 동로마 진영의 용병 부대 중 훈족과 함께 가장 강력한 전투력을 자랑하였다.]의 족장이 하인을 죽였고, 나르세스 앞에 소환되었는데 끝까지 잘못을 부인하였다. 건방진 태도에 분노한 나르세스는 그를 처형하였는데, 그러자 헤룰리 부족 전체가 종군을 거부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나르세스는 그에 동요하지 않고 단단하고 빽빽한 대형을 갖춘 프랑크 측에 맞서 타기나이 전투와 비슷하게 진형을 짰다. 일련의 전투 이후 충성심이 확인된 랑고바르드족을 중심으로 용병대가 중앙부에 흐트러지지 않은 밀집 대형으로 배치되었고 그 뒤에 궁병대, 측면에 기병대가 자리하였다. 나르세스 본인은 우익의 기병대 지휘를 맡았다. 그리고 발렐아누스가 좌익 기병대를 지휘하였는데 그들의 일부는 아르타바네스의 지휘 하에 인근의 작은 숲에 매복하였다. 한편, 전투 직전에 헤룰리 족의 장군 신두알이 부족을 다시 설득해 보겠다고 청원하여 나르세스는 보병대 중앙부에 틈을 벌려 놓았다. 554년 10월 초, 나르세스는 캄파니아의 [[카푸아]] 인근 하천인 볼투르누스 강가에서 알레마니족의 3만 대군과 대치하였다. 나르세스와 대치하던 게르만 군대에 대하여 역사가 아가티우스는 '매우 거칠고 무례하며 기병대 없이 보병 위주로 구성되었다. 그들의 검은 왼쪽 다리에 묶여 있었고 주요 무기는 던지는 도끼와 갈고리가 달린 투창이었다'고 기록하였다. 전투 직전에 헤룰리 족의 병사 두명이 프랑크 측으로 전향하여 헤룰리 용병이 참전하지 않은 지금이 승리할 절호의 기회라고 부틸리누스를 설득하였다. 이에 알레마니 - 프랑크 군대는 쐐기 모양이 되어 동로마 진영 중앙부의 틈으로 돌진하였고, 로마군은 밀리는듯 하였다. 이에 나르세스는 급히 자신이 지휘하던 기병대를 이끌고 기동하여 프랑크 인들의 후미를 습격하였고, 궁기병대로 하여금 제대로 갑옷을 갖추지 않은 게르만 인들에게 화살 세례를 퍼붓게 하였다. 반나체의 병사가 대부분이었던 프랑크 인들의 대오가 흐트러졌고, 앞뒤로 동로마 군대에 포위되어 진퇴양난에 빠졌다. 적들이 혼란스러워하자 신두알의 설득으로 갈등하던 헤룰리 족도 다시금 전장에 합류했고, 이것이 치명타가 되며 프랑크 인들은 전멸하였고 사령관 부틸리누스마저 혼전 중에 전사하였다.(카실리눔 전투, 554년) 레아가티우스에 의하면 동로마 측은 오직 80명의 전사자가 생긴 반면 고트 - 프랑크 진영은 오직 5명의 고트인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과장이 있었겠지만, 사실 관계야 어떻든 간에 나르세스의 대승이었다는 점은 확실하였고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평정을 확고히 한 전투이다. 프랑크 - 알레마니 인들이 패퇴하며 538년부터 프랑크 왕국이 지배하던 리구리아 일대도 동로마 령으로 편입, 19세기 [[사르데냐 왕국|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사보이아 가문]]과 [[카밀로 카보우르]]가 주도한 [[이탈리아 통일]] 전쟁 이전 마지막으로 이탈리아 전 지역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나르세스는 그해 11월에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 로마 장군으로서는 마지막 개선식을 치렀다. 7천명의 고트족이 저항을 이어가던 캄파니아의 도시 캄프사도 555년 봄에 함락되었다. 포강 이북의 마지막 동고트 도시였던 베로나와 브레시아도 562년 11월에 항복하며 이탈리아 전부가 80여년에 로마 제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몇 년 못 가서 랑고바르드족의 침공으로 이탈리아 전역 지배가 오래가진 못했다.] 이후 나르세스는 1만 5천에 달하는 랑고바르드 / 헤룰리 / 아바르 용병들에게 후한 포상을 주고 계약을 해지, 알프스 이북으로 돌려보내었다. 이탈리아에는 1만 6천의 동로마 군대가 배치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의지로 실행된 20여년간의 고트 전쟁과 이탈리아 반도의 수복에는 30만 파운드 (13만 6천 kg = 136톤)의 금이 소모되었다. 이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라벤나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나르세스를 이탈리아 총독으로 임명하여 통치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동로마 제국은 엄청난 전비를 소모하여 국가 경제에 심각한 위기가 초래될 지경이었고, 결국 본국의 경제 위기를 해소하고 전비를 회수하기 위해 기존의 동고트 족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두게 된다. 불가피한 결정이었지만, 로마 시에서 나르세스에게 가혹한 통치에 대해 탄원하러 보낸 대표단이 '''차라리 [[그리스인]][* 이 때부터 동로마인을 그리스인이라고 타자화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당신들보다 고트족을 모시는 게 낫겠다'''고 했을 정도로 민심 이반을 부른 건 부정할 수 없었고,[*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35p, 원문: 'the 'Romans' complain to Narses about his harsh rule, threatening that it would suit them better to serve the Goths than the Greeks.'] 나르세스는 12년간 총독을 지낸 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 사망 2년 후인 567년에 죽었다. 나르세스 사후 568년에 랑고바르드 족이 남하하여 금세 이탈리아의 중남부까지 치고들어오게 된다. 고대 이탈리아는 (5세기의 서로마 멸망기가 아니라) 비교적 단시간에 고트, 동로마, 랑고바르드로 주인이 계속 바뀌던 이 6세기 중·후반에 끝났다는 것을 암시하는 제목을 달고 나온 서적이 있다. ([[https://www.amazon.com/Imperial-Tragedy-Constantines-Destruction-363-568/dp/1781256322|'Imperial Tragedy: From Constantine’s Empire '''to the Destruction of Roman Italy''' AD 363-'''568'''']]) 프랑스 사학자인 Bertrand Lançon 또한 저서 [[https://www.amazon.com/Rome-Late-Antiquity-Ad-313-604/dp/0748612408|'Rome in Late Antiquity: AD 313-604']]에서 이 고트 전쟁기가 로마 시에 있어서 고대 후기 중 가장 암흑기였다고 하였다.[* 영어 위키백과 [[https://en.wikipedia.org/wiki/Totila|Totila]] 중, 'French historian Bertrand Lançon described this period of late antiquity as Rome's "darkest hours."']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